살아가는이야기

배신당하지 않는 비법

찬란원 2013. 3. 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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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2013.3.19 . 퍼온글(일간스포츠)

 

6.25전쟁 때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천석꾼 지주가 있었다. 그는 다른 마을의 지주들은 모두 인민재판을 받고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다는 소식에 태연했다.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잘 베풀었으니까 죽진 않을꺼야.”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죽을 이유가 없었다. 머슴의 자식에게 학비를 대주고 소작농의 혼례에 축의금도 두둑하게 챙겨줬다. 마을 사람들이 다 자기 덕분에 연명을 했으니 절대 죽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천석꾼의 착각이었다. 얼마 후 그도 저승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를 죽이자고 적극 선동했던 이는 모두 그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천석꾼은 죽는 순간까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떻게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느냐!”며 소리치며 목숨을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많은 천석꾼, 만석꾼들이 이렇게 죽임을 당했다. 본인들은 소작농들에게 많이 베풀었다 생각할진 몰라도 소작농들은 또 그만의 설움이 있는 법이다. 어떻게 사람이 마냥 잘 해주기만 했을까. 해준 것만큼 부려 먹으려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 아니겠는가.

남에게 은혜를 베풀면 ‘언젠가 저 사람이 보답하겠지’라고 생각한다. 절대 그래선 안 된다. 그저 내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한 지인이 내게 하소연했다. “지금까지 부하 직원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매번 배신을 당했습니다. 이번에는 저를 고발까지 한대요. 어떻게 부하 직원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부하 직원에게 배신당하지 않는 비법은 없다. 부하 직원이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배신하게 되어 있다. 배신을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내 인생의 구세주요, 은인이다.

부하직원의 심리는 간단하다. 사장이 잘 먹고 잘 살면 속으로는 ‘네가 누구 때문에 잘 사는데!’ ‘나는 너를 위해 24시간 종처럼 일하고 있는데 너는 매일 고급차를 타고 다니면서 골프나 치러 다니지!’ 하면서 가슴에 응어리가 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응어리들이 오랜 시간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배신’이라는 방법으로 폭발하고 만다.

부하 직원에게 배신당하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얼마 전 후암선원을 찾아온 노년의 부모는 자식에게 큰 배신을 당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우리 부부를 모시고 살겠다고 해서 유산을 미리 물려줬어요. 그랬더니 우리 몰래 이민을 가서는 연락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부모들의 태도였다. “우리 아들이 몸이 허약한데 외국생활을 잘 할 수 있을 지 걱정이에요. 무슨 병이라도 걸리는 건 아니겠죠?” 노부부는 살아생전 아들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노부부는 자식이 자신들을 배신했다고는 상상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배신은 자식이 하든, 부하직원이 하든 똑같은 배신이다. 그러나 자식이 배신하면 후하게 용서하면서 남이 배신하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자식에겐 한없이 베풀면서 남에겐 베풀면 꼭 생색을 낸다. 결국 자식도 남도 똑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배신당하지 않는 비법은 없다. 다만 배신을 당한 뒤에도 스스로 자멸하지 않는 방법은 있다. 바로 방생이다. 살아있는 물고기를 풀어주는 방생보다 더 큰 방생이 있다. 내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주는 일이다. 내 마음 속에 미움을 지우고 증오를 없애며 용서의 방 한 칸을 내줄 때, 비로소 배신의 악연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