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천국 (625 편)
[ 자료출처 : 인터넷 일간스포츠 - 갓모닝 차길진 법사 칼럼 ]
과연 천국은 있을까.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천국에 대해 물었다고 가정해 보자. “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도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이다
. “만약 천국이 물속에 있다면 물고기가 천국에 제일 많이 당도했을 것이오, 하늘에 있다면 새들이 제일 많이 당도할 것이다.
천국은 어느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너희들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이 세상에 극락과 지옥은 따로 있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 불같이 화를 내면 지옥이오, 안락한 행복을 느끼면 극락이다. 불경을 보면 지옥에 대한 묘사는 매우 생생하지만 극락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
천국도, 극락도 가 본 사람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천국은 무지개 저 너머에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존재가 천국이다.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2017년이라는 연도도 없고 하루 24시간, 1년 365일도 없다.
천국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영원한 지금만 존재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해 왔다. 과거에 태어난 것 같지만 태어나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오, 미래에 죽는 것 같지만 죽는 것도 지금 이 순간에 죽는다.
시간은 인간이 만든 개념이다. 그 시간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들어 있지만 정작 인간은 오직 지금 현재에 있다. 시간은 우리의 의식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시간은 인생의 의식 대상에 기준을 제시하는 텔레포트다. 시간은 분별 속에서 존재하며, 분별을 떠나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항상 천국에 산다.
불교에서는 삼매, 무아지경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어떤 경지에 정신이 빠져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바로 그 순간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사랑할 때, 명상할 때, 죽음을 맞이할 때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여인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매불망 사랑하는 임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고 수준의 명상 단계에서도 잠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맞이할 때도 오직 죽음의 순간만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과 명상, 죽음은 모두 같다.
빚쟁이가 찾아와 5분 동안 돈을 달라고 으름장을 놓을 때는 같은 시간이라도 마치 몇 년이 흐른 것처럼 고통스럽고 지겹다.
반대로 좋은 음악을 듣고 있을 때는 몇 시간이 됐든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삼매에 흠뻑 빠진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때가 바로 천국이다.
시간은 마음속에 있다고 누누이 얘기하지만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구명시식이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의식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 이 순간에 행해지는 구명시식이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모든 분별과 구별이 사라지며 오직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지금’이라는 시간만 존재하는 의식이 구명시식이다.
문득 신라시대 부설거사의 ‘열반송’이 떠오른다. ‘보되 본 바가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듣되 들은 바가 없으니 시비가 끊어진다. 옳고 그름을 모두 놓고 마음의 부처를 만나니, 내 마음의 부처에게로 돌아가리라.’ 천국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은 진실로 깨달을 때 느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세 개의 소중한 금이 있는데 그중에 ‘지금’이 제일 소중하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을 깨달은 사람이야말로 천국에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과 천국의 관계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624 편 )
옛날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산속을 걷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그는 호랑이를 보자마자 하늘에 빌었다. “저는 처자식과 노부모를 모시고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 누가 보살피겠습니까. 살려 주십시오.”
호랑이는 점점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또 빌었다. “평생을 살면서 큰 죄를 진 적도 없습니다. 정말 착하게 살았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제가 없으면 우리 가족은 굶어 죽습니다.”
하늘은 그의 기도를 듣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과연 착하게 생긴 남자가 호랑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었다. 하늘이 그 남자를 살려 주려고 하는 순간 이번에는 호랑이가 하늘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굶어 죽을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를 어찌 아시고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다니요.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저를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 줬을까.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하늘은 호랑이의 기도를 들어 주었다. 안타깝게도 남자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기도의 차이다. 청원의 기도보다 감사의 기도가 하늘을 움직였기 때문에 하늘은 사람이 아닌 호랑이를 살려 줬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그렇듯이 후암에도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하러 온다. ‘대학 입시에 붙게 해 주십시오’ ‘취직을 하게 해 주십시오’ 등 대부분이 청원의 기도다. 그러나 무엇을 해 달라고 청원하기보다 무엇을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당연히 내게도 많은 분들이 부탁을 한다. 법문이 끝나면 나가기 전에 내 손을 붙잡고 간절한 얼굴로 소원을 말하고 가시는 분들도 많다.
그런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내게 청원하기에 앞서 내가 쓴 ‘영혼산책’을 한 번 더 읽어 보시라고. 책 안에는 기도·소원·감사 등에 대해 소상히 적어 놨다. 만약 책을 꼼꼼히 읽었더라면 청원보다는 감사한 얘기를 먼저 했을 것이다.
청원을 넣고 기를 한 번이라도 더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지만 소원을 이루면 다들 떠나가게 돼 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해 준 기억도 없는데 “법사님, 감사합니다.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잘 해결됐습니다. 마음을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하는 분들이 더 큰 소원을 이룬다.
그렇다고 모든 분들이 소원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소원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고 소소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오히려 항상 작은 일에 감사해한다. “뭐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라고 거꾸로 내가 물어봐도 “이만하면 살 만하죠.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게 더 많은 분들이지만 말이다.
호랑이의 기도는 그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살면서 감사해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할 것이다. 세상을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결과로 다가오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인연과 함께 살고 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이 하늘을 움직일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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