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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일상일기/해외여행

광개토왕비(태왕비) 및 왕릉과 장수왕릉에서

by 찬란원 2019.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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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18() 안도현에서 출발하여 저녁무렵 4시쯤 집안시에 도착 후 바로 420분 장수왕릉에 도착하여 우리나라의 광활한 중국 동북삼성지역을 대륙 영토를 차지한 역사유적지에 첫발을 디딜 때 내 마음은 벅찬 가슴이 뛰게 하였다.

한 시간 정도 장수왕릉 유적지를 돌아보면 분명히 우리나라의 역사의 영토임을 불구하고 중국에서 동북공정에 따라 역사왜곡 등 유적지를 관리하고 있는 것에 대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나마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고구려의 역사유적지를 찾아가는 것에 대한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다시 한번 인식하게하고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날 719() 아침 일찍 장수왕릉 연접지역인 광개토왕비(태왕비)와 왕릉을 8시쯤 입장하여 한시간정도 유적지를 관람하고 우리나라의 광활한 영토를 가진 중국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다시 한 번 민족의정기와 새로운 역사에 중요성을 깨달고 요령성  단동시로 향한다.

 

▣ 광개토왕왕릉비(태왕비)소개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

비는 각력응회암()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이 불규칙하여 글자 수 통계에 이론이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이 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제1면 1행 ~ 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동명왕),유류왕(=유리왕),대주류왕(=대무신왕) 등의 세계()와 광개토왕의 행장()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제1면 7행 ~ 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과 1,400개의 촌()을 공파()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과 토경순수()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부분(제3면 8행 ~ 4면 9행)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 연호()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廣開土大王陵碑] (두산백과)

 

광개토왕릉(태왕릉)소개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에 있는 고구려의 왕릉급 돌무지무덤[積石塚] ]

현재는 분구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기단부와 그 위층의 방단부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무덤 기단의 한 변은 약 63m이며, 너비 약 1.75m, 높이 6m가량의 대형 석재 5개가 받치고 있다.

각 방단 내부는 막돌과 장돌로 채워졌으며, 분구 정상부 가까이에 설치된 매장부는 굴식 돌방의 형태이다.

돌방의 방향은 서향이며 널길은 널방 서벽 한가운데에서 시작된다. 널방의 천장부는 3단의 평행굄으로 짜여졌으며, 천장은 대형 화강암 판석으로 덮여 있다.

분구 정상부에서 명문전과 와당이 발견된다.

무덤 바깥으로는 무덤구역을 알리는 흙담이 둘러져 있다. 무덤의 동북 500m 거리에는 유명한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명문전의 내용, 무덤의 규모, 광개토왕릉비 등을 근거로 광개토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수왕릉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릉

 

 장수왕릉 소개

 

장수왕릉(長壽王陵)은 중국 지린성 통화시 지안시(集安市) 퉁구(通溝)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돌무덤(石塚 석총)으로서,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흔히 장군총(將軍塚)으로 불린다. 산 아래에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33 미터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미터로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한다.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정부(頂部)는 만두형(饅頭形)을 하고 상단부에 1열의 구멍이 있어 정상에 건축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안쪽에는  향당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었으리라 추정했지만,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는 추세이다.

이곳은 현재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 정책으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다.

안팎 전부를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석축릉으로 구조가 정연하고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한 듯하여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으며, 축석분으로서 거의 안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묘실은 횡혈식으로 벽화가 그려졌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석실의 위치는 높고 밑으로부터 3단째 단을 상(床)으로 하고 있다.

최상단의 상면(上面)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장방형의 거대한 1매의 천정석이 있으며, 연도(羨道)는 서남방으로 있으며 천장은 큰 돌 3매로 되어 있다.

현실의 4벽은 6단으로 쌓고 각 벽의 위에는 굵고 모진 기둥을 옆으로 높여서 천정석으로 받치고 있다.

현실의 크기는 가로·세로의 높이가 모두 5미터 이상이며 상(床)으로 오기(基)의 관대(棺臺)가 있으며, 기단의 4주에는 넓이 4미터의 돌을 두르고 자갈로 채워져 있다.

 4벽과 천장에는 본래 칠을 하였으며 벽화가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전부 박락(剝落)되고 없다. 각 층의 외부에는 기와로 덮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모두 무너지고 잡초만이 무성하다.

※ 자료출처 : 위키백과

장수왕릉 가는길
장수왕릉 입구
장수왕릉 안내도
왕릉주변 조경

 

장수왕릉 전경

 

장수왕릉주변을 둘러보면서
장수왕릉 석양에 비추는 전경
왕릉에서 야생화꽃
집안시 장수왕릉 유적지에서 하루 마무리하고
광개토왕릉 및 태왕비가는길 그리고 매표소입구

 

집안시 관광안내판
광개토왕릉.비 주변 조경들 (원추리와 수양회화나무)
광토왕비

 

광개토왕릉가는길(능수회화나무 가로수길)
광개토왕릉전경

 

광개토왕옥체 안식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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