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데 수원에서 살면서도 바쁘다는 핑계 등으로 인해 수원화성을 역사 탐방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번 코로나 전염병관계로 답답한 일상생활 속에서 일이 줄어들어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팔달문 시작으로 수원화성 성곽 따라 팔달산 화성장대(서장대)를 거쳐서 대승원에 따라 화서문, 장안문, 화홍문 및 방화수류정, 동장대를 따라 창용문, 팔달문 등 3시간 동안 여유롭게 성곽 역사길을 둘러보았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보면 과거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면서 어느새 에 팔달문에 도착하였다. 일생에 가장 가까운 수원화성 역사길을 한바퀴 돌아본다는 것이 큰 행운이다.
앞으로 수원화성 성곽길을 다시 가보고 싶은 날이 있는지 꿈과 생각의 추억으로만 간직한다.
■ 수원화성소개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백 년간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改名)하고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줄곧 수원은 화성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 지방 관제개편 과정에서 다시 수원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수원시로 불리고 있다.
수원부를 옮기고 정조 17년(1793)부터 화성 축조가 본격적으로 준비되어 이듬해 정월부터 시작해 2년 반 만인 1796년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성벽 전체 길이는 당초 정약용이 생각했던 4㎞보다 늘어난 5.4㎞ 정도이다. 성곽 시설에서도 적대나 누죠, 공심돈, 포로 등과 같이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설이 많이 도입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4∼6m 정도이고 성벽 위에는 1m 정도 높이의 여장을 두고 여장에는 총안을 뚫었다.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규형(圭形) 쌓기를 기본으로 했다. 성벽에는 4개의 성문을 두었고 암문 5개를 설치해 통행토록 하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는 행궁이 자리 잡았다. 화성이 위치한 지세는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그 반대쪽인 동쪽에도 나지막한 구릉이 있으며 이 동서 경사지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주위에 약간의 평지가 펼쳐진다. 화성을 비롯해 우리나라 성은 자연 지세를 이용해 불규칙한 형태로 쌓아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가 있는데 북문이 장안문이고 반대 남쪽이 팔달문이다. 동서에 청룡문과 화서문이 있다. 남북 문은 중층 문루로서 도성 문루에 버금가는 규모와 형태를 갖고 있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행하고 양식을 나르는 통로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개 벽돌을 많이 사용했고 원 여장 등의 특수한 장식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암문에는 보통 건물을 세우지 않지만 서남암문에만 예외적으로 포사를 설치했다. 이외에도 수문 2곳, 적대 4곳, 노대 2곳, 공심돈 3곳, 봉돈 1곳, 치성 8곳, 포로 10곳, 장대 2곳, 각루 4곳, 포사 3곳 등의 시설이 있다.
당시 화성 건설에 관한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담겨 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세계적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대승원(大乘院)은 1954년 고봉 스님에 의해 ‘마하사‘로 창건되었고 1961년 한국불교의 근대화와 교리의 체계화를 위해
사단법인 '불교사상연구회'로 등록하였으며 1968년 현재의 대승원(大乘院)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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